
솔직히 저는 곡성을 처음 봤을 때 이 영화가 단순한 공포 영화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서도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영화는 156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관객을 현혹시키고, 결국 우리 모두가 악마의 미끼를 물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듭니다. 전라남도 곡성의 평화로운 마을에서 시작된 연쇄 살인 사건, 그리고 그 사건의 중심에 선 일본인 외지인과 무명이라는 여인, 박수무당 일광까지. 저는 이 영화를 보며 제가 직장에서 겪었던 억울한 경험이 떠올랐고,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만든 편견의 비극
곡성의 마을 사람들은 일본인 외지인이 나타난 뒤부터 이상한 일이 생겼다며 그를 의심합니다. 경찰은 독버섯 중독에 의한 환각 증세라고 발표하지만, 사람들은 근거 없는 소문에 자신들의 두려움을 더해 외지인을 악마로 확정 짓죠. 여기서 '집단 귀인 오류'라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집단 귀인 오류란 특정 사건의 원인을 객관적 증거 없이 특정 대상에게 돌리는 심리적 편향을 의미합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회사에서 어느 업체와 말싸움이 생겼는데, 누가 봐도 업체 쪽이 계약을 어기고 납기를 지키지 않은 것이 명백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회사 이사님은 사실 관계를 확인하지도 않고 제가 소통을 잘못해서 문제가 생겼다는 식으로 몰아갔습니다. 마치 곡성의 마을 사람들이 외지인을 악마로 규정한 것처럼, 저는 문제를 일으킨 사람으로 낙인찍혔던 겁니다.
영화 속 종구는 외지인의 집에서 희생자들의 사진과 딸 효진의 실내화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외지인이 범인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종구는 확증 편향에 빠져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었습니다. 그 결과 외지인을 찾아가 개를 죽이고 폭행을 가하는 등 폭력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았죠.
나홍진 감독은 이 영화에서 '상징적 폭력'을 교묘하게 드러냅니다. 상징적 폭력이란 사회적 편견이나 선입견이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억압하는 보이지 않는 폭력을 말합니다. 외지인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낯선 사람이라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의 증오와 폭력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2016년 개봉 당시 일부 관객들은 영화 속 일본인 혐오 묘사에 대해 논란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제가 이사님께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도 바로 이겁니다.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행동해도 늦지 않는데, 이미 저를 문제 직원으로 확정하고 나서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되면 뭐가 달라질까요? 이미 받은 상처는 지워지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선의를 의심하는 위험성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무명이라는 여인이 종구에게 던진 경고입니다. 무명은 "닭이 세 번 울 때까지 집에 가지 마라"고 말하며, 자신이 외지인을 잡기 위해 덫을 놓았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같은 시각, 무당 일광은 종구에게 전화를 걸어 "무명이 진짜 귀신이고 외지인은 그 귀신을 잡으려던 사람이었다"며 당장 집으로 가라고 외칩니다.
종구는 극심한 혼란에 빠집니다. 누구를 믿어야 할까? 결국 그는 무명의 경고를 무시하고 집으로 달려갔고, 그 순간 무명이 쳐놓은 결계가 시들어버리며 비극이 시작됩니다. 여기서 '인지 부조화' 현상이 나타납니다. 인지 부조화란 서로 모순되는 두 개 이상의 정보 사이에서 심리적 불편함을 느끼며 결정을 내리기 어려워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저도 후임을 대할 때 비슷한 상황을 겪습니다. 제가 후임에게 쓴소리를 하고 진심으로 조언을 해주는데, 그 친구는 가끔씩 제 말을 참견이나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좋은 말만 해주는 선배들에게는 잘 따르더군요. 황당하게 느껴지는 게, 저는 그 친구가 실수할 때마다 소중한 기회를 놓치는 모습을 여러 번 봐왔거든요.
영화 속 무명은 실제로는 마을을 지키려던 수호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종구는 그녀의 선의를 의심했고, 대신 일광과 외지인이 던진 거짓말을 믿어버렸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부정성 편향'이라고 부릅니다. 부정성 편향이란 긍정적인 정보보다 부정적인 정보에 더 큰 주의를 기울이고 더 강하게 반응하는 경향을 의미합니다. 종구는 무명의 차분한 경고보다 일광의 긴박한 전화에 더 큰 무게를 두었던 겁니다.
한국심리학회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위기 상황에서 침착한 조언보다 급박한 경고를 더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이는 생존 본능과 관련이 있는데, 급박한 상황에서는 빠른 판단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곡성에서 보듯이, 이러한 본능이 오히려 비극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제 후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조언을 해주면 귀담아듣지 않다가, 당장 기분 좋은 말을 해주는 사람들에게 현혹됩니다. 저는 그 친구가 나중에 후회할까 봐 걱정이 되지만, 선의를 의심받는 입장에서 제가 더 어떻게 해줄 수 있을지 고민이 많습니다.
현혹의 본질과 선택의 책임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충격적입니다. 외지인은 동굴에서 악마의 본모습을 드러내며 기괴하게 웃고, 일광은 희생자들의 사진을 챙기며 유유히 사라집니다. 결국 외지인과 일광은 한패였고, 무명만이 유일하게 마을을 지키려던 존재였던 것입니다. 영화 내내 반복되던 대사 "미끼를 확 물어버린 것이여"는 바로 이 순간을 위한 복선이었습니다.
나홍진 감독은 교차 편집 기법을 통해 관객을 의도적으로 현혹시킵니다. 일광이 살을 날리는 굿을 하는 동안, 산속의 외지인도 의식을 치릅니다. 관객은 자연스럽게 일광이 외지인을 공격하는 것이라 믿게 되지만, 사실 외지인은 효진을 좀비로 만드는 의식을 치르고 있었고 일광의 굿은 그 과정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서사 구조를 '비신뢰적 화자(Unreliable Narrator)' 기법이라고 부릅니다. 비신뢰적 화자란 이야기를 전달하는 화자나 시점이 의도적으로 관객을 오도하는 서사 전략을 말합니다.
종구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비극을 초래했지만, 그 선택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딸을 살리고 싶은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빠른 판단을 내려야 하는 압박감, 그리고 무엇보다 확실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의 선택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영화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선의에서 출발한 선택이라도, 그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종구의 비극은 단순히 잘못된 선택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편견에 사로잡혀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선의를 의심하고, 급박한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반응한 결과입니다. 영화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통념을 날카롭게 파고듭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통계에 따르면, 곡성은 2016년 한국 영화 관객수 7위를 기록하며 688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며 단순한 공포 이상의 메시지를 받아들였다는 의미입니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명확합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얼마나 쉽게 편견에 사로잡히는가? 그리고 그 편견이 초래하는 결과에 대해 얼마나 책임감을 느끼는가?
곡성을 보고 나면 일상의 작은 선택들이 다르게 보입니다. 누군가를 판단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게 되고, 보이지 않는 선의를 의심하기 전에 그 사람의 입장을 먼저 고려하게 됩니다. 영화는 끝났지만, 우리가 물어버린 미끼의 무게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곡성이 명작으로 불리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