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 영화를 그냥 웃고 끝내려고 틀었습니다. 권상우 특유의 코믹 액션이나 실컷 보자는 심산이었죠. 그런데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화면 속 주인공이 제 고민을 대신 살고 있는 것 같아서요. 지금 커리어와 행복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면, 이 영화가 예상 밖의 답을 건네줄 수도 있습니다.
전직 암살 요원이 웹툰 작가를 선택한 이유
영화 히트맨(2020)의 주인공 준(권상우)은 국정원 비밀 프로젝트인 '방패 연대' 출신의 에이스 요원입니다. 어릴 때부터 인간 병기로 길러졌고, 조직 내에서의 커리어 트랙은 누가 봐도 탄탄했습니다. 여기서 커리어 트랙이란 조직 안에서 개인이 밟아 나가는 성장 경로를 의미합니다. 사회적 시선으로 보면 그는 이미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준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 뛰어들어 자신의 죽음을 위장합니다. 그가 선택한 것은 무명 웹툰 작가의 삶이었죠. 제가 이 장면을 보면서 꽤 오래 멈칫했습니다. 조직의 에이스가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결단이, 너무 비현실적이기는커녕 오히려 제 속마음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저도 지금 하는 일을 계속 이어가면 커리어 면에서는 분명히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매일 출근하면서 드는 감정은 성취감이 아니라 답답함입니다. 재미도 없고, 끝나고 나서 뿌듯하지도 않습니다. 영화는 이 감각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었습니다. 준이 왜 도망쳤는지, 논리가 아니라 감정으로 이해가 됐습니다.
꿈을 선택한 뒤 찾아오는 현실의 무게
준이 선택한 삶은 낭만적이지 않았습니다. 15년이 지난 뒤 그의 모습은 악플 세례를 받는 폭망 웹툰 작가였고, 공사장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가장이었습니다. 독자들의 반응은 냉혹했고, 현실은 그가 꿈꾸던 그림과 달랐습니다.
이 부분이 영화에서 가장 솔직한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꿈을 좇으면 행복해진다는 말은 절반만 맞습니다. 꿈을 향해 가는 길 위에도 실패가 있고, 생활고가 있고, 주변의 냉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준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느낀 건 '그래도 저 사람은 자기가 선택한 바닥 위에 서 있구나'라는 점이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자기 결정이론으로 설명합니다. 자기 결정이론이란 인간이 외부의 강요가 아닌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행동할 때 더 높은 내적 동기와 심리적 안녕감을 느낀다는 이론입니다. 실제로 직업 만족도에 관한 연구에서도 연봉이나 직급보다 '자율성'과 '의미감'이 장기적인 행복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가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출처: 한국직업능력연구원).
결국 준이 보여주는 것은 꿈을 선택하면 고생이 없다는 판타지가 아닙니다. 실패하더라도 스스로 선택한 길 위에서 실패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태도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고 정리가 됐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저 스스로 어느 쪽으로 조금씩 기울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히트맨이 웹툰 작가보다 나은가: 직업 만족도로 보는 선택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사실 꽤 구체적입니다. 사회적 성공 지표와 개인의 내적 만족, 이 두 가지가 충돌할 때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입니다. 준에게 암살 요원은 전자였고, 웹툰 작가는 후자였습니다.
직업 심리학에서 자주 쓰이는 개념 중에 번아웃 증후군이 있습니다. 번아웃 증후군이란 과도한 업무나 스트레스로 인해 신체적·정신적 에너지가 고갈되고, 무기력함과 냉소가 만성화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제 경험상 이건 단순히 피곤한 것과는 다릅니다. 쉬어도 채워지지 않고, 결과물을 내놓아도 공허한 느낌이 지속됩니다.
직업을 선택하거나 유지할 때 실질적으로 고려해야 할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매일의 업무가 나에게 에너지를 주는가, 소모시키는가
- 5년 후 이 자리에 있는 스스로를 상상할 수 있는가
-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 자체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 실패했을 때도 다시 시도하고 싶은 분야인가
준은 15년간 악플을 받으면서도 다시 만화를 그렸습니다. 그게 저는 꽤 중요한 신호라고 생각합니다. 좋아하는 일은 실패해도 다시 하게 됩니다.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직업 선택 시 '적성과 흥미'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꼽은 응답자가 전체의 40% 이상을 차지했으나, 실제 직업을 선택할 때 적성보다 '안정성'을 우선시한 비율이 더 높게 나타났습니다(출처: 한국직업능력연구원). 알고는 있지만 선택하지 못하는 것, 바로 그 간극이 많은 분들의 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의 한계와 그럼에도 남는 메시지
솔직히 이 영화가 명작은 아닙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개연성보다 우연에 기댄다는 느낌이 강하고, 가족애를 과도하게 강조하는 신파 코드가 흐름을 끊습니다. 슬랩스틱 코미디의 밀도도 취향을 많이 탑니다. 세련된 서사를 기대하고 보면 실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캐릭터 설계만큼은 꽤 잘 됐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서사 구조 분석에서 자주 쓰이는 개념인 캐릭터 아크란 주인공이 이야기 안에서 내면적으로 변화하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해 가는 여정을 의미합니다. 준의 아크는 단순히 '요원이 다시 싸운다'가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정체성을 지켜낸다'에 가깝습니다. 그 부분이 영화를 끝까지 보게 만드는 힘이었습니다.
조연인 덕규(정준호)와 철이(이이경)의 케미스트리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케미스트리란 배우들 사이의 호흡과 감정적 교류가 화면에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정도를 뜻합니다. 두 사람의 티키타카는 영화가 처지는 구간에서 리듬을 살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제가 직접 본 소감으로는, 이 두 사람이 없었다면 후반부가 꽤 힘겨웠을 것 같습니다.
영혼을 죽이면서 버티는 삶을 선택하지 말자는 말을 저는 다른 분들께도 드리고 싶습니다. 준이 결국 웹툰 작가로 다시 서는 결말은 해피엔딩이라기보다, 자신이 고른 길의 값을 치른 사람이 얻어낸 결과처럼 보였습니다.
히트맨은 아무 생각 없이 보기에도 좋은 영화지만, 지금 커리어와 행복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면 한 번쯤 다른 눈으로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선택의 정답은 영화도 저도 알려드릴 수 없지만, 어느 쪽으로 기울고 있는지 스스로 확인하는 계기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틀었다가 잠깐 멈칫하게 되는 영화, 그걸로 충분히 값어치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